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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차의 역사

Carpe Diem/Tea Story

by TOS_lab 2024. 12. 17.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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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문화란 인간의 발자취가 닿는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삶과 문화가 축적된 결과물이 바로 역사입니다. 유명한 역사가는 "역사는 영원히 끊임없이 발전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며, 이를 후손에게 전하고 후손 또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 바다로 향하고, 그 흐름 속에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대만 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과거에 대한 후회 없이 전진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숙성차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대만 차의 역사는 더욱 중요합니다. 비록 과거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과거 대만 차 산업의 발전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대만 숙성차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말기(1860~1895)

 

1683년, 청나라 장수 시랑이 펑후를 점령하고 대만에 상륙하자 정극상이 항복하여 대만은 청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대만부가 설치되고 주뤄, 펑산, 타이완 등 3개 현을 관할하면서 푸젠성에 편입되었습니다. 청나라 초기 대만 개발은 주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건륭제 시기에 이르러서야 북부 지역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북부 평야 개발은 1711년 이후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주로 벼농사를 위한 평야 개간에 집중했고, 산간이나 구릉 지역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1860년 이전 대만 경제의 중심은 쌀과 설탕 생산이었고, 1800년경 평야 대부분이 개간을 마쳤습니다. 인구 증가와 평야 개발 완료로 사람들은 점차 구릉·산간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구릉·산비탈 지역은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차, 쪽, 고구마 같은 특용 작물이 재배되었습니다.

 

초기 대만 차 생산은 주로 푸저우와 취안저우 출신들이 담당했으며, 특히 안시 출신이 많았습니다. 대만에서 차나무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810년 이후로, 단수이강 상류와 따한시, 신뎬시, 지룽허 유역의 구릉지대를 따라 차밭이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의 차 수출이 활발했고, 지역 분업 체계에 따라 대만에서도 차 재배와 생산 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생산된 차는 샤먼과 푸저우로 운반되어 정제·판매되었습니다.

 

대만 차를 세계에 알린 인물은 영국인 존 도드(John Dodd)였습니다. 그는 1865년 대만을 찾아 장뇌 생산지를 시찰하던 중, 북부 지역 차 품질과 토양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대만 차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이듬해 안시에서 차 씨앗과 묘목을 대량 구입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를 장려했으며, 대출까지 지원해 재배 확대를 도왔습니다. 1867년 존 도드는 대만 차를 수매해 푸저우에서 가공·정제한 뒤 마카오에 시험 판매했고, 대만 차는 향기롭고 독특한 풍미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에 확신을 얻은 그는 1868년 멍자(현재의 완화)에 차 정제 공장을 세우고 정제 장비와 도구를 마련한 뒤, 푸저우에서 초빙한 기술자의 지도로 대만 현지에서 직접 정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869년에는 "Formosan Tea"라는 이름으로 대만 차를 미국 뉴욕에 수출해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외국 상인들이 대만에 들어와 우롱차를 높은 가격에 매입하면서 대만 차 수출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했습니다. 청나라 말기 대만 우롱차 산업은 그야말로 "차 산업의 황금기"라 불릴 만했습니다.

 

청나라 말기 대만 우롱차 제조법은 무이암차에서 유래되어 찻잎 모양이 길쭉했습니다. 당시 대만에서도 포종차를 생산했으나 우롱차 수출이 어려워지자, 차 상인들은 차 잎에 꽃 향을 입힌 '훈화 포종차'를 판매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조형(條形) 포종차와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당시 수출용 차 정제 공장은 우롱차를 다루는 '번장관', 포종차를 다루는 '포가관', 그리고 두 종류를 모두 취급하는 '우롱포차관'으로 나뉘었습니다. 번장관에서 우롱차를 상자에 포장하면, 매판이나 마진관이 외국 상인에게 차 샘플을 제출하고, 외국 상인은 품질 평가 후 번장관과 가격 협상을 통해 차를 거래했습니다. 외국 상인들은 차를 샤먼이나 홍콩으로 보내 미국 등 소비 지역으로 수출했고, 포종차는 꽃 향을 입혀 동남아시아나 중국 동북 지역으로 수출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1895-1945)

 

일제 강점기 때인 1895년, 대만의 차 재배 면적은 약 2만 5천 헥타르였고, 우롱차와 훈화 포종차를 생산했습니다. 일본은 대만을 점령한 후 차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1901년에는 차 재배 면적이 약 2만 7천 헥타르로 늘어났고, 1919년에는 4만 7,845헥타르로 일제 강점기 최대 면적을 기록했습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 동안 대만에서는 기존 포종차(조형 포종차), 철관음차, 동방미인차, 홍차 등 다양한 차가 생산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차 수출 호황으로 차 재배 면적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받았지만, 2차 세계 대전 종전 시점에도 여전히 3만 4천 헥타르가 넘는 면적에서 차를 재배했습니다. 주요 차 생산지는 신주와 타이베이였습니다. 신주에서는 먀오리, 주난, 주둥, 중리, 신주, 따시, 타오위안 등에서 차를 생산했고, 타이베이에서는 원산, 하이산, 지룽, 치싱, 신좡, 단수이 등에서 차를 생산했습니다. 난터우에서는 밍젠, 주산, 푸리, 위츠 등에서 차를 생산했습니다. 타이중과 타이난에서는 차 생산량이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에는 우롱차와 훈화 포종차가 주로 생산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구형 철관음차가 인기를 얻었고, 중기 이후에는 기존 포종차, 동방미인차, 홍차가 개발되어 지역 특색을 대표하는 차로 자리 잡았습니다.

 

 

광복 이후 대만 차 산업 발전 (1945년~현재)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와 자바는 전쟁으로 인해 차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습니다. 대만 차 산업은 과거의 탄탄한 생산 기반과 민간 업체들의 노력, 그리고 정부의 지원과 자금 대출에 힘입어 국제 차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차밭은 빠르게 복구되었고, 공장도 다시 가동하면서 차 수출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360만 킬로그램이 넘는 차를 수출했습니다. 당시 수출 차의 대부분은 홍차였지만, 몇 가지 문제점에 직면했습니다. 소엽종으로 만든 홍차는 대엽종보다 품질과 인지도가 낮았고, 품질과 가격 면에서 인도, 스리랑카, 자바산 홍차와 경쟁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으면서 주요 수출 시장도 북미에서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으로 옮겨갔고, 홍차 수출은 점차 감소했습니다.

 

국제 정세 변화로 중국 본토의 녹차 수출이 어려워지고 일본 녹차 생산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만 녹차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당시 상하이에서 차 사업을 하던 상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하여 덖음 녹차를 생산하고 북아프리카에 수출하면서 성공을 거두었고, 대만 녹차 수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출 시장을 일본으로 변경했고, 대만 녹차 수출은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품질 향상에 실패하고 석유 파동과 생산 비용 증가, 중국 녹차의 일본 시장 점령 등의 요인으로 녹차 수출은 급격히 감소했고, 대만 차 수출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녹차 수출이 매년 감소하면서, 넓은 차밭에서 생산되는 차 잎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홍차는 품질과 가격 경쟁에서 인도와 스리랑카에 밀렸고, 우롱차 시장도 침체되었기 때문에 농림청은 대만 차의 생산 및 판매 구조를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부는 차 품질을 높이기 위해 우수 차 품평회와 차 제조 기술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 판촉 행사를 통해 국민들의 차 소비를 장려했습니다. 1981년에는 차 제조 공장 설립 규정을 폐지하여 차 농가의 직접 생산 및 판매를 장려했고, 차 시장을 성공적으로 내수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1975년에는 난터우현 루구에서 전국 우수 차 품평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품평회에 출품된 차는 반구형 포종차였습니다. 품평회 이후, 이 차는 "둥딩 우롱차"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고, 언론 광고를 통해 홍보하면서 차 가격 상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이후 반구형 우롱차가 대만 차 시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둥딩 지역에서는 주로 청심 오룡 품종을 재배했는데, 이 품종으로 만든 둥딩 우롱차는 현재의 반구형 포종차보다 발효도가 높고, 굽는 정도가 강하여 숙성된 맛이 났으며, 달콤한 맛과 깊은 목 넘김을 중시했습니다. 현재는 원산 차 생산지에서 조형 포종차를 생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반구형 포종차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tbrs.gov.tw/ws.php?id=4803


https://www.tingeofsoul.co.kr/143/?idx=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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