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백자 #3] 백자항아리의 특징과 변천 : 17세기

데이타베이스/문화

by TOS_lab 2023. 7. 10. 17:40

본문

728x90

16세기 말 부터 17세기 초까지 수차례의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국력은 쇠퇴하였고 대부분의 산업은 침체와 단절의 위기를 맞았다. 도자수공업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여 17세기 초 양질백자의 생산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후, 금, 은, 동과 같은 물자의 조달이 어려웠던 당시에는 왕실에서도 각종 금속기명(金屬器皿, 금속제품)을 자기(磁器)로 대체하면서 도자의 수요는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급증한 도자수요에 비해 공급여건이 열악했던 17세기 전반에는 도자기 생산체제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였다. 청화백자는 왕실의 제례기명으로 가장 중요한 기명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안료인 회회청을 구할 수가 없어 왕실의 연례제사에 필요한 용준(龍樽, 용을 그린 그릇), 화준(花樽, 꽃을 그린 그릇)조차 번조(燔造, 그릇을 구워서 만들어 냄)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17세기에는 청화백자가 거의 제작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시기 백자에서 발견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철화백자의 증가를 꼽을 수 있다. 

 

[그림 1]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

 

17세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를 살펴보면, 청화백자 항아리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고 용이 그려진 용문호도 청화백자용준을 대신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그림 1]과 같이 철화백자용준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항아리도 입호와 원호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입구가 안으로 살짝 내경하는 형태로 어깨가 둥글게 벌어지다 저부로 가면서 서서히 줄어드는 입호 형태다. 입구 부분에는 당초문이, 바로 이어지는 어깨 부분에는 변형된 이중연판문이, 몸체 최하단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다. 가운데의 주문양은 여의주를 움켜쥐려는 역동적인 4조(爪)를 지닌 용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의 표현 등은 17세기 철화백자항아리의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백자 넝쿨 무늬 항아리

 

17세기 원형 항아리의 문양 소재로는 용 외에도 [그림 2]와 같이 넝쿨무늬(당초문, 唐草紋)로 장식한 것이 있다. <백자 넝쿨 무늬 항아리>는 넓은 입구 부분이 짧게 직립하다가 끝에서 외반되고 있으며 기면에는 크게 두 곳에 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몸통이 완전한 구와 같은 형태라기보다는 약간 꺾임이 주어진 듯한 형태다. 이러한 형태는 원형의 항아리에 비해서는 시기가 조금 내려오는 형태로 생각된다.

 

[그림 3]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

 

17세기 중후반 경에는 대형의 원형 항아리가 많이 제작되었다. 문양 장식이 있는 예로는 역시 용 무늬가 많은데, 청화백자로도 철화백자로도 만들어졌다. [그림 3]의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원에 가까운 항아리로 청화로 운룡문(雲龍文, 구름과 용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다. 구름사이로 용의 몸통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7세기 청화백자의 제작이 거의 없는 사정을 생각해본다면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 4]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

 

 

[그림 4]의 <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시문화된 용이 간결하면서도 심하게 왜곡 변형되어 있다. 용 그림은 반추상화되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조차도 어려우며 구름도 심하게 변형되어 있다. 신성과 권위의 상징인 용이 이처럼 극적으로 변형되어 해학의 맛을 풍기는 것 역시 17세기 철화백자에서 가능한 얘기인 것 같다. 


[원문]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항아리 - 조선의 인과 예를 담다", 2010.6, p 14 ~ 15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