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철학을 통해 사회의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세월과 함께 체계는 문화가 되고 문화는 그들만의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일본과 중국, 영국 등 차를 즐겨마시고 차문화가 발달한 국가에는 그들만의 서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철학과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현재 꽃피운 그들의 차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아가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갈 "차 문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베아트리스 호헤네거의 "차의 세계사 - 동양으로부터의 선물"은 각 국가의 차문화와 이런 차문화가 서양에 전파된 과정 등을 심도있게 다룹니다.
오늘은 이 중 "일본의 차문화"의 뿌리가 되는 "일본의 선과 차의 대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 차나 한 잔 합시다.
오후의 햇살이 대숲을 화사하게 비추고, 샘물은 기쁨에 들떠 흐르고, 탕관에서 솔잎 사이로 부는 산들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아, 덧없는 것을 꿈꿨던 어리석음과 사물의 아름다움 속에서 서성거립니다.
- 오카쿠라 카쿠조 <차의 책>, 1906년
1591년 2월 28일, 일본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많은 존경을 받은 일흔 살의 노인이 의식적인 자살인 할복을 했다. 그는 일본의 통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친구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죽음의 시를 지은 후 배에 칼을 꽂았다.
"칠순 인생, 내가 이 칼을 잡고 있는 순간 부처도, 조사도 없다" 라는 시를 남긴 사람은 센노 리큐(1522 - 1591)로, 후대에 일본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위대한 차의 대가이자, 일본인의 의식에 차와 선을 영원히 새긴 인물이었다.
센노 리큐 이전 수세기 동안, 일본의 승려와 학자들은 중국에 건너가 여행했고 건축 설계, 예술 기법, 정부 형태 등 중국적인 개념과 관념을 갖고 돌아왔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국이었으며 변방에 불과한 일본은 중국 문화를 숭상했다. 중국에서 유학한 승려들은 불교와 차뿐만 아니라 중국의 절에서 일반적으로 수행되던 다례 역시 배워서 돌아왔다. 일본에 상륙한 첫 번째 차는 병차(동그란 모양) 또는 전차(벽돌 모양)의 형태였다.
종교적 경로를 통해 일본에 처음 차가 소개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절에서만 사용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귀족사회로 퍼져나갔다. 불자였던 쇼무천황(701 - 756)[1]은 나라 안의 수백 명의 승려들에게 차를 대접했다고 한다. 사가천황(786 - 842)[2]은 중국 문화를 매우 숭배했는데 황궁에 다원을 만들고 그의 연회에 차를 포함시켜 차의 대중화에 공헌했다. 당시 사용된 차는 둥근 형태의 긴압차(운반의 편의와 장기간 저장을 위해 차 잎에 수증기를 가한 다음 틀에 넣고 압착하여 일정한 형태의 덩어리를 만들어 후발효시킨 차)로 일본에서는 단차라고 알려진 것이었다. 단차는 당나라 때 일반적인 차로, 부수어서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넣어 소금과 양념을 가미해서 국처럼 끓여서 마셨다.
에이사이[3]가 상류층과 교류하며 선을 전파시키고 귀족에게 다례를 침투시킨 것에 반해, 에이존은 일반 민중에게 차를 전파했다. 그 결과 두 가지 형태의 음다법(차를 마시는 방법)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다회는 비싼 중국 다기를 자랑하는 데 중점을 둔 사교행사에 가까웠다. 반면에 승려와 민중의 소박한 차는 일상생활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두 개의 다도는 점차 사무라이(무사계급) 사이에 서서히 녹아들어 갔다. 신흥 무사계급은 권위를 원했고, 그 수단으로서 다회의 사교기능을 이용했다. 전투 집단인 사무라이들은 궁중에서 신봉되고 있던 보수적인 불교(천태종)보다 금욕적인 선종의 형식과 교리를 선호했다. 선종의 승려들은 황실이 아니라 쇼군들에게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 책사나 문화 담당관 역할을 했다.
권위를 잃어가는 황실에 반해 쇼군정권은 점점 더 영향력이 커졌고 선불교와 함께 차문화 역시 더욱더 융성해졌다. 장군들은 전투에 승려를 동반했다. 규정된 의례에 따라서 선승이 차를 대접하는 이동 다실은 연 이은 전토 중에 후퇴하기 위한 좋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사무라이들은 무로마치 시대(1338 - 1573)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 하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도구로 다회를 개최했다. 원래 선사의 서재였던 서원은 거대하고 형식적인 연회장으로 변했고, 사무라이들의 다회를 위한 전통적인 공간이 되었다.
선승들은 주인이 소장한 예술작품과 다기의 배치를 정하며 주인에게 차의 맛과 문화의 궁금증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그들은 다회에서 나아가 방의 장식, 다기의 배치, 꽃꽂이의 규칙을 정리하고 기록했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규범에 기초하였다. 이처럼 선문화는 무사계급의 사교문화와 결합되어, 선의 대가는 차의 대가가 되었다.
이런 차의 대가 중 한 사람이 바오 무라타 쥬코(1423 - 1502)이다. 전직 노름꾼에서 선승이 된 쥬코는 차를 준비하고 마시며, 다기를 배치하고 가구를 선택하는 다회를 사교행사가 아닌 불자의 길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구로 보았다. 그의 공헌으로 다회는 다도, 즉 차의 도가 되었다. 그는 화려한 사원(쇼인) 풍의 다실 대신 간소한 초암을, 화려한 중국 다기 대신 소박한 일본의 다기를 선호했다. 그의 영향으로 다도는 중국 수입품에서 진정한 일본식 차노유, 말 그대로 '차를 위한 뜨거운 물'이라는 방식으로 진화되었다.
타케노 죠우(1502 - 1555)는 쥬코의 이상을 따라 와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다도의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와비는 원시적인 소박함, 마음의 진실함과 불완전의 미를 탐미하는 것으로, 선과 더불어 일본 미의식의 중심적 요소이다. 그는 다실은 작고 소박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4조 반 형태의 다다미로 된 다실을 고안했다. 짚으로 만든 돗자리인 다다미는 넓이가 약 1.8 제곱미터로 규격화되어 있었다.
일본은 쥬코와 죠우 이후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위대한 다인을 기다려야 했다. 정신적, 미학적 세련됨을 극대화시킨, 차노유를 국민적 예술 형식으로 변화시킨 인물은 바로 다도의 대가이자, 최고의 다사(차선생)인 센노 리큐이다.
리큐는 오사카 근처 사카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임제종의 중심지인 교토 근처의 다이토쿠지에서 선을 공부했다. 그는 대가 타케노 죠우에게 직접 와비의 개념과 차를 배웠다. 리큐는 총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제자로서 부유한 상인 계층과 상류 무사계급이 즐기는 차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아시카가의 몰락 이후 가장 강력한 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차선생으로 그를 선택했다. 노부나가가 자객에게 살해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리큐를 차선생으로 데려갔다. 히데요시와 리큐의 만남은 차노유의 예술적 승화에 있어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히데요시는 차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그는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원했고 장려했으며,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였던 그가 스스로 '비루한 일'인 차의 작법을 배웠다 다른 쇼군처럼 그는 선을 가까이했으며 와비 양식을 존중했지만, 그는 공식적인 막부회에서는 과시하듯 사원 다실에서 차를 대접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다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며, 그의 권력과 부를 방문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외부 세력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천황을 초대헀을 때, 벽과 다기는 물론이고 다실 전체를 금으로 치장해서 그의 부와 권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리큐는 히데요시의 차 선생으로 사원의 다실에 배속되어 외교적 조언자이자 가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이러한 역할에 얼마나 만족해하고 즐겼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는 전제정치 시대였으므로 가신은(존경받는 차선생도 가신에 불과했다) 군주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리큐는 소박함과 성실함을 뜻하는 다도인 와비차를 완성하여 진정한 차의 정신세계를 창조하는데 공헌했다.
리큐는 창조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고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차를 준비하고 마시는 의식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조화로움을 발견하고 삶의 본질을 경험하는 둘도 없는 기회이며, 마음의 순수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장이며, 일상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다실은 고요함과 검소함이라는 와비정신이 스며든 단순화가 요구되었다.
죠우의 가르침에 따라 선 수행을 했던 리큐는 더 나아가 실내는 4조 반 크기의 다실을 2조 크기(3.6 평방미터)의 작은 오두막으로 줄였다. 다실은 보여주기 위한 장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졌다. 벽에는 값비싼 중국 회화가 아닌 단순한 서예 족자를 걸었다. 값비싼 수입 다구 대신 질박한 일본 자기를 썼다. 그는 도공을 시켜 지극히 거친 질그릿인 라쿠 그릇을 만들어 일본에 새로운 미의식을 소개했다. 꽃 장식 역시 과장된 것 대신 고고한 한 송이 꽃만을 절제하여 사용했다.
세상으로부터 이상적인 은신처인, 두 평의 암자는 도교적 의미에서 자연과의 결합을 표현하였으며, 주인과 손님이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헀다. 1582년 리큐는 히데요시를 위해 다이안이라는 다실을 지었는데, 여기서 이러한 개념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 다실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리큐는 화려한 사원 다실이 아닌 와비 암자에서 고위 관리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 자신도 리큐의 지도 아래 열성적인 와비 다인이 된 것이다.
다실에 들어가는 방법도 대담하게 변화시켰다. 리큐 이전의 다실은 고귀한 손님을 위한 출입문인 키닝구치가 있었다. 이 문을 통해 사람들은 선 채로 걸어서 다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은 더 작은 문인 니지리구치, 약 7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되는 문을 통과해야 했고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구부려야 했다. 리큐는 이런 불공정을 없애고 귀족이든 상인이든, 혹은 사무라이나 일반인이건 모든 손님은 니지리구치로 입장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것은 신분과 서열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작은 출입문을 통해 다실에 들어갈 때 몸을 굽혀야 했고 귄위를 상징하는 칼 같은 소지품은 외부에 두어야 했다. 이것이 리큐가 의도했던 것이었다.
리큐는 밖에서는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든 다실은 사회적 평등과 우애의 장소라고 믿었다. 권위에 도전하여 사회적 평등이나 우애와 평화 등의 사상을 봉건주의적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 일본에 전파시킨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의 가치는 오늘날까지도 차노유의 실천을 통해 세계 전역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리큐의 최고의 사회적 성공은 1587년에 히데요시가 귀천을 불문하고 일본 전역의 다인이 참가하는 대다회를 선포했을 때였다. 이것은 10월 초에 교토 기타노의 마쯔바와에서 행해진 기타노 대다회였다. 귀족과 일반인 가릴 것 없이 팔백 명의 다인이 모여서 각기 다른 미학적 경향과 견해에 따라 다정이 설치되었다. 온갖 종류의 다기와 회화가 전시되고, 각각 다른 종류의 차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히데요시도 직접 그의 와비식 초암에서 차를 끓였다. 리큐가 진두지휘했던 엄청난 대규모 행사는 일본 문화에서 차가 얼마나 중요하게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히데요시는 단순한 다회가 아닌 거대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타노 대다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권력의 환경에서 리큐는 절묘하게 균형을 맞춘 삶을 살았다. 군주가 황금 다실을 보여주는 동안 리큐는 와비 초암을 만들었다. 군주가 정치적 음모의 일환으로 다회를 여는 동안, 리큐는 고위관리들이 니지리구치로 몸을 굽혀서 들어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와비의 에술을 차용했다고 해도 그는 일본의 통치자였고 예측할 수 없는 냉혹한 사람이었다. 왜 그가 리큐에게 할복을 명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학자들은 몇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일부는 히데요시가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려는 계획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군주의 권위에 반항한 데 따른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리큐의 숭배자가 다이도쿠지에 만들어놓은 리큐의 초상이 히데요시를 격노하게 만든 게 아닌가 추측한다 왜냐하면 히데요시가 리큐의 초상화 아래로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히데요시가 첫째 아들을 잃고 정신이 혼란하여 충동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던 게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인식은 정치와 와비가 도저히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리큐의 위치가 완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리큐는 처음부터 자신이 걷는 길의 위태로움을 의식하고 있었다. 죽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와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년이 자니지 않아 진정한 다도가 몰락할 것인데, 그때 사람들은 오히려 번창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세속적 유희가 되는 비참한 사태에 빠질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므로 나는 슬프다"라고 말하기도 헀다. 어쩌면 이것이 주군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거절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 역시 영적인 의식과 정치적 야망 사이의 두 갈래 위태로운 길을 걸었다. 그의 삶은 인간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외비 다인과 변덕스러운 전제 군주가 같은 몸에 동거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가장 깊은 와비 정신은 자신이 노래로 표현한 차노유 해석에 나타난다.
"끝을 알 수 없는 마음속을 퍼 올리는 것이야말로 차노유라는 것을 알듯 말듯"
[1] 쇼무천황(701-756) : 일본의 제45대 왕으로 집권하는 동안 대규모 불교사찰과 공예품 제작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한 인물로서, 불교는 그의 재위기에 사실상 일본의 국교가 되었다.
[2] 사가천황(786 - 842) : 일본의 52번째 천황으로 한시 및 서예에 조예가 깊어 초기 헤이안 시대의 3대 명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3] 에이사이 : 1214년 송나라에서 말차를 가지고 귀국했다.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는 시기를 거친 후 천태종 승려 에이사이(1141 - 1215)는 중국 본토로 건너갔다. 그는 차의 종자와 당시 중국 송나라에서 애용되던 가루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의 다도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연녹색의 말차다. 에이사이는 또한 선의 가르침을 갖고 돌아와 일본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고대 도교 이론에 따라서 차의 의학적 효능을 예찬한 논문 <끽다양상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차와 건강, 선의 명상은 에이사이의 친구인 묘예와 승려 에이존(1201 - 1290)에서 계승되었다. 묘에는 승려이자 차를 직접 재배한 시인이었고, 에이존은 처음으로 차를 절 밖의 대중에게 소개한 사람이었다. 에이존은 처음으로 차를 절 밖의 대중에게 소개한 사람이었다. 에이존은 일본 전력을 떠돌아다니면서 선의 깊은 의미를 전파하고, 차로 빈민과 병자를 치료했다. 마치 최초의 도교 승려들이 약사이자 빈민 구호를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출처 : 베아트리스 호에네거, "차의 세계사", p 61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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