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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69] 신화와 전설의 베일뒤로

데이타베이스/차(茶) 관련 자료

by TOS_lab 2023. 9. 2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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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봉우리에는 기이한 것들이 다 모여 있다. 
그곳에서 차나무가 자라서 산골짜기마다 가득하다.
풍요로운 대지의 자양분을 먹고 밤에 내리는 감로를 마신다.
때는 초가을 농사일 한가로울 때
짝지어 함께 길떠나 차를 따러 간다.
물은 민강의 맑게 흐르는 물을 뜨고
다기는 잘 골라서 동구요에서 나온 것으로 고른다.
옛사람들이 마시던 대로 표주박으로 찻잔을 삼아
첫 차를 만드니 가루는 가라앉고 잔거품은 떠올라
환하기가 희 눈 같고 빛나기가 봄 햇살 같네.

- 두육 <천부>

차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음료일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있어 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중요한 음료이자 가장 오래된 음료이기도 하다. 인류가 차를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학자들은 역사 이전의 전설과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고대중국의 치료사들은 차가 대지의 영혼과 정수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약초와 광물을 실험했는데, 이것들이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식물과 광물이 영혼의 정수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좋은 색'을 띠게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옥의 비취색은 그 빛나는 녹색 때문에 아주 강한 효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치료사들은 상록수인 차나무의 이 향긋한 초록빛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비췻빛 거품'으로 알려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신농은 중국의 신화속의 삼황 중 두 번째 신으로 추앙받는다. 전설에 따르면 신농은 기원전 28세기에 어머니가 신룡에게서 영감을 얻어 태어났다고 한다. 신농은 황소의 뿔과 머리를 갖고 있고 몸은 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말했고 칠 일 후에 걸었다. 나무를 잘라 구부려서 쟁기와 보습 같은 농기구를 발명해서 한족에게 농경을 가르쳤고 염제라는 지위를 얻었다. 나아가 약초를 연구하고 많은 약초 처방을 만들었다. 신농의 배는 투명하여 위장이 다 보여서 섭취한 음식물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온갖 종류의 약초, 나뭇잎, 열매, 과일, 뿌리의 맛을 보고 그 효능을 관찰하고 독의 존재 여부나 각 식물의 유용성 여부를 관찰했다. 하루는 맛을 보다가 72번이나 중독되었는데 이때 신농은 차를 먹고 해독을 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신농은 중국 의학의 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또 모든 차에 관련된 책들은 최초의 차나무 발견자로서 신농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 

 

신농이 처음 차나무를 발견하게 된 경위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가 중국 남부의 산맥 지대를 여행할 때였다. 늦은 오후 신농이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끓인 물이 안전하다고 신농이 가르친 대로, 하인들은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갑자기 언덕에서 불어온 바람에 근처 덤불에서 날아온 마른 잎들이 끓는 물에 떨어졌다. 호기심 많은 약초학자인 신농은 이 혼합물을 마셔보았는데 살짝 쓴맛이 느껴졌지만 원기가 회복되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기운이 넘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나뭇잎에 영혼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실험을 해보기 위해 집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차는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인류는 차라는 멋진 선물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2732년의 일이었다. 

 

이런 오래된 이야기에 정확한 연대가 남아 있는 게 신기하지만 이것은 사건에 역사성을 부여학 위해 이야기와 연대를 끼워맞추려고 하는 중국인의 오랜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차의 시작은 기호음료가 아닌 치료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의학서인 〈신농본초경〉에서도 차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신농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매우 이른 시기부터 차가 존재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작자미상으로 훨씬 뒤인 후한(25 ~ 220) 시기에 쓰인 것이다. 차에 대한 부분 역시 3세기 정도 지난 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모순이 있긴 하지만 〈신농본초경〉에는 차에 대한 흥미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차는 술보다 좋은데, 절대 취하지 않게 하며, 사람이 어리식은 말을 하지 않게 하여, 맑은 정신에서 그것을 후회하게 하지 않는다. 차는 물보다 낫다. 병을 전파시키지 않으며, 오염된 우물물 처럼 독성을 띠지 않는다." 같은 통찰력 있는 문구가 실려 있다. 

 

프랑스의 민족 식물학자인 조르쥬 메테이유는 차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신농본초경〉이 아니라 동진(317 ~ 420)의 상거가 지은 〈화양국지〉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파지"편에 보면, 기원전 10665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명망시킨 뒤에 은나라의 유민으로부터 차를 조공받은 기록이 있다. 그 밖의 기록들에서도 차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가 기원 전후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다양한 다른 언어들이 사용되었고, 한자 표기가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에 오해는 피하기 어렵다. '차'라고 번역된 것이 실제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한의 학자이자 철학자인 양웅(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최초로 언어 간의 차이를 관찰해서 사전인 〈방언〉을 저술했다. 그는 이 사전에서 차는 사천성과 운남성의 주민이 마신 것이라고 했다. 이 지역은 중국의 남부와 서부에 위치하며 한나라 때(기원전 206 ~ 기원후 220)에 차가 처음으로 야생에서 농경 작물로 전환된 곳이기도 하다. 그 뒤 차 농사는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 4세기에는 차에 대한 신용할 만한 기록이 비교적 자주 나타난다. 의학자인 화타는 〈식론〉에서 차를 오랫동안 마시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기록했으며, 유교 경전의 집대성인 〈이아〉에서도 차를 '잎을 끓여서 만드는 음료'라고 정의하고 있다. 명사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5세기 책 〈세설신어〉에는 전하의 혜제가 차를 사랑해서 그의 친구들에게 자주 권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이 너무 써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정중히 사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세기에 차는 약효가 있는 음료이자 일상품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차를 끓여서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탕처럼 마셨다. 

 

이렇게 끽다는 중국에서 대중화되었으며, 오늘날처럼 차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로 만든 곳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차나무가 어느 곳에서 맨 처음 기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오랫동안 중국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인도의 아삼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차나무가 발견되면서 중국 기원론에 혼란이 빚어졌다. 중국 차나무는 잎이 작은 소엽종이지만 운남 등지에서 발견된 오래된 차나무들은 인도 아삼처럼 대엽종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차나무가 인도에서 온 것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신농 전설에서 한참 후대인 후한 시대의 전설에는 서한의 감로 연간(기원전 53 ~ 49)에 감로사의 승려이자 학자인 보혜선사 오리진이 인도에 불교를 공부하러 갔다가 일곱개의 차나무를 갖고 돌아와 사천성의 몽정산에 심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차의 기원은 인도가 된다. 

 

실제로 인도 동북부의 원주민은 몇백 년 어쩌면 몇천 년 일지 모르는 세월에 걸쳐서 차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차의 역사에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지역에서는 차나무 잎을 음료가 아니라 음식으로 만들어서 오랫동안 먹어왔다. 오늘날까지도  기름, 소금, 마늘, 참깨와 함께 절이거나 물고기 또는 동물의 지방과 섞어서 먹고 있다.

 

정글에서 거주하던 사냥꾼-채집자들은 농경문화의 시작과 함께 이웃한 중국 주민에게 차나무 씨앗과 관슴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문서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하여튼 윌리엄 유커스는 1935년 그의 백과사전적 연구서 〈차에 대한 모든 것〉에서 차나무는 수천 년 동안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국경지역에 이미 존재했다고 적고 있다. 순수하게 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대자연의 초기 차 농장은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부(사천성, 운남성 지역), 라오스 북부, 미얀마, 타이 등의 구릉 지역에서 발견된다. 인도 정글의 부족민 또는 중국의 약사 중 누가 먼저 원시적인 차 한 잔을 끓였는지 현재인은 알 수 었다. 그러나 재배 작물로서의 차는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것, 그리고 음료로서 차의 역사는 적어도 이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라.
가슴을 평화롭게 하라.
모든 현상들이 소란스러워졌다가 다시 조용해지는 것을
그저 지그시 바라보라.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결국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며,
그 돌아감은 평온하다.
존재의 근원을 알지 못할 때
그대는 혼란과 슬픔 속에 괴로워한다.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깨달을 때, 
그대는 자연스레 친절해지며 분별심이 사라져
매사에 기뻐하게 되고, 할머니처럼 너그러워지며,
왕 같은 위엄을 얻게 된다.
현실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즐기게 될 때,
그대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를 받아들이게 되고,
죽음이 찾아올 때도 반겨 맞이하게 된다

- 노자 <도덕경>

 

차는 처음 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약초사와 치료사들은 차를 도가사상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들은 차를 단순한 치료약에서 신성한 음료이자 불로장생의 영약 같은 천상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도가는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전국시대(기원전 480 ~ 221)때 시작된 사상이다. 제후들은 2세기 이상 군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이웃 국가들은 침입하여 서로 처절하게 싸웠으며 끊임없이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나라가 최후에 다른 제후국들을 평정하고 기원전 221년 최초로 통일 중국을 만들었다.

 

도교 이념은 부분적으로 그 시대의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분위기에 대항하는 반동으로 발전되었다. 세상사에 환멸을 느낀 도의 신봉자들은 신비주의와 개인적 영적 수행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다. 그들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살고 자연과 우주의 조화를 구하며, 삶의 흐름에 대항하기보다 몸을 맡기는 무위의 삶을 추구했다. 

태초의 고요함과 만물의 조화로운 위대한 회귀는 수행과 깨달음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1906년 오카쿠라 텐신은 〈차의 책〉에서 일본 다도에서 이런 사상을 발견했고 이렇게 쓰고 있다. "다도는 가면을 쓴 도교이다."

불사의 영혼이라는 개념은 도교사상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다. 도교 연단술의 중심과제는 이 불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사들은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영혼이 불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육체적으로 잘 사는 것이 영성의 중심적 요소라고 믿었다. 건강을 위해서 정신과 육체, 영혼을 통합하는 고대 도교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중국 의학의 주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최초의 치료사들이 차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 신비로운 식물이 제공해 주는 다양한 은혜에 감탄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을 맑게 각성시키고 상처를 치료했으며, 또 식량의 귀중한 대체물이었으며 물보다 더 안전한 음료였다. 도가의 연단술사들은 육체의 에너지와 생명력, 정신에 있어서 자신들의 연구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이렇게 차는 영생을 위한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도사들은 이렇게 차를 재배하게 되었고 최초의 차 농장주가 되었다. 그들은 도관 근처에 이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도관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이상적인 고도에 세워지는 일이 많았다. 도사들은 다른 약초들과 같이 차를 조제해 주었고, 의사의 치료를 받을 만한 여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다. 당시 도교 사원들은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였으므로 서구의 성과 교회 주변에 마을이 생기는 것과 유사하게 사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겼다. 차는 점차 사원에서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고 일반 주민들에게도 귀중한 식품의 지위를 얻었다. 이런 관점에서 도사들은 건겅과 영성 양면에서 차의 가치를 넓힌 최초의 사람들로 볼 수 있다. 

 

도가의 아버지이자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도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손에 한 잔의 차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늙은 노자는 자신의 지례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자, 서쪽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그가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 제자인 윤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스승을 기다렸던 윤희는 한 잔의 차를 스승에게 대접하고, 그에데 잠시 머물러 가르침을 달라고 청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도덕경〉이다. 

 

이 신성한 책이 가르쳐주는 심오한 성찰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함곡관에서 윤희와 노자의 만남은, 일반적인 중국 가정에서 깊은 우의가 깃든 가장 큰 환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환영의 의미로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단순하고 완벽한 도교의 수행인 것이다. 


출처 : 베아트리스 호에네거, "차의 세계사", p 1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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