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서사 프레임워크의 이해 : 정책을 움직이는 이야기

 

 

1. 배경

 

현대 정책 과정에서는 이야기(narrative)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복잡한 통계나 건조한 수치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공감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스토리입니다. 특히 환경이나 에너지와 같은 가치 충돌이 빈번한 분야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기후 변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There's No Planet B(지구를 대체할 행성은 없다)"라는 감성적 슬로건만 보더라도, 정책 담론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이론이 바로 정책서사 프레임워크(Narrative Policy Framework, NPF)입니다. 이 글에서는 NPF의 전체적인 개요와 형성 배경, 핵심 개념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특히 환경 및 에너지 정책 분야에서의 실제 적용 사례와 학술 연구를 통해 NPF의 실질적 의미와 가치를 깊이 있게 탐색해보겠습니다.

 

 

2. 기원과 배경: 정책과 이야기의 만남

 

정책서사 프레임워크(NPF)는 정책 과정을 '이야기'라는 렌즈를 통해 분석하기 위한 체계적인 이론적 틀입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정책학자들이 "이야기"가 어떻게 정책 결정과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2010년경 지금의 NPF라는 명칭으로 정식 이론화되었습니다.

 

이들 학자는 기존의 담론 분석처럼 질적 접근에서만 다뤄지던 '서사(narrative)'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경험적·계량적 방법론으로도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정책 정보를 받아들일 때 결코 완전한 '합리적 판단자'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은 방대한 정보를 모두 검토하기보다, 자신의 기존 신념을 강화해주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야기 형식을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NPF는 바로 이 심리적 특성에 착안하여, 이야기가 어떻게 정책 이해와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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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핵심 개념: 이야기 구조로 본 정책

 

NPF에서는 정책 서사(policy narrative)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이러한 구성 요소들을 통해 서로 다른 정책 담론을 체계적으로 비교·분석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다음 네 가지 요소가 핵심을 이룹니다.

 

1. 배경(Setting) : 이야기가 전개되는 맥락과 환경, 즉 특정 정책 문제가 놓인 시공간적 배경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정책이라면 최신 기후 과학 데이터, 관련 사회경제적 여건, 국내외 제도적 환경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대체로 논쟁의 여지가 적은 객관적 전제나 사실관계로 구성되며, 이야기의 기본 무대를 형성합니다.
2. 등장인물(Characters) : 서사에는 주로 영웅(hero), 악당(villain), 희생자(victim)라는 세 유형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웅은 정책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 주체이며, 악당은 문제를 야기하거나 해결을 방해하는 세력, 희생자는 피해를 입거나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의미합니다. 주목할 점은 등장인물이 꼭 개인이나 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자체가 희생자, "기업"이나 "정부"가 악당이나 영웅으로 형상화될 수도 있습니다.
3. 줄거리(Plot) : 사건의 전개와 인과관계를 이끄는 이야기의 흐름입니다. 전형적인 시작-중간-끝의 구조를 통해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연결해 줍니다. 예를 들면 "환경 수호자(영웅)가 기후위기의 주범(악당)을 상대로 싸운다"거나, "과도한 환경 규제가 지역 산업과 일자리(희생자)를 위협한다"는 식으로 구성이 가능합니다. 실제 연구에서는 해상 풍력단지 건설 사례를 분석할 때, '통제(control)'와 '쇠퇴(decline)'라는 두 가지 주요 줄거리 유형이 반복적으로 발견되었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4. 교훈 또는 해결책(Moral of the Story) :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해당하며, 청중이 얻어야 할 교훈이나 구체적인 정책적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탄소중립 정책을 신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식의 명확한 메시지가 제안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정책 서사가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문제의 심각성만 강조하고 해결책은 모호하게 남겨두는 '미완의 서사'도 현실 정책 논쟁에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NPF는 또한 분석 수준을 세 단계로 명확히 구분합니다.

 

• 미시(micro) 수준에서는 개인이 특정 이야기에 어떻게 인지적·정서적으로 반응하고, 이를 통해 정책 신념을 형성하는지 살펴봅니다.
• 중간(meso) 수준에서는 다양한 정책 행위자와 옹호연합, 언론 매체 등이 공론장에서 벌이는 이야기 경쟁의 역동성을 분석합니다.
• 거시(macro) 수준은 한 사회의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문화적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다루며, 미시와 중간 수준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는 큰 틀의 '메타 내러티브'를 탐구합니다.

 

4. 환경·에너지 정책 사례: 이야기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

 

환경 정책 영역에서는 어떤 이야기로 문제를 규정하고 틀 짓느냐에 따라 여론과 정책 결정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후변화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에서, 한쪽에서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거대한 악당으로서의 기후위기,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영웅적인 과학자 집단과 미래 세대"라는 강력한 내러티브를 구사합니다. 반면 다른 진영에서는 "과도한 환경 규제가 지역 경제와 일자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결국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자가 된다"는 완전히 반대되는 서사 구조를 제시합니다.

 

에너지 정책 분야에서도 이러한 대립적 서사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대표적 사례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 해안 인근에 대규모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건설하려던 프로젝트가 무산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찬성 측은 풍력 에너지를 "친환경 미래를 이끄는 깨끗한 에너지의 영웅"으로 내세운 반면, 반대 측은 이를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지역 어업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형상화하며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반대 측 내러티브가 더 강력한 공감을 얻으면서 거대 프로젝트가 좌초된 바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수압파쇄(fracking) 기술을 통한 셰일가스 개발, 원자력 발전 대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논쟁 등 에너지 정책 전반에 걸쳐, 각 진영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서사를 전략적으로 구축하여 대중의 인식과 여론을 주도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청중(유권자)의 정서적 코드와 핵심 가치관에 부합하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 구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보수 성향 집단에게는 "지역 일자리와 경제 활성화"를 강조하는 서사가, 진보 성향 집단에게는 "지구 공동체 윤리와 세대 간 책임"을 부각하는 서사가 더 효과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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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학술 연구 사례: NPF로 본 환경·에너지 이슈

 

NPF는 이론적 틀을 넘어 학술적으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실증 연구의 기반으로 활발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에너지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습니다.

 

• 기후변화 커뮤니케이션 연구: 기후변화 담론에서 어떤 유형의 이야기 구조(등장인물, 줄거리 패턴 등)가 대중의 정책 지지도를 효과적으로 높이는지 실험 방법론을 통해 검증한 연구들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는, 구체적인 '영웅' 캐릭터가 등장하고 실질적 행동 방안이 제시되는 이야기의 경우, 단순히 위험과 재앙만을 강조하는 추상적 이야기보다 시민들의 행동 의지와 정책 지지도를 훨씬 효과적으로 높인다는 결과입니다. 이는 기후위기 커뮤니케이션에서 희망과 행동 가능성을 담은 서사의 중요성을 시사합니다.
- 언론 보도 분석: 미국 콜로라도주의 서로 다른 지역 언론들이 수압 파쇄(fracking) 문제를 보도할 때 나타나는 서사 구조의 차이를 분석한 연구가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지역 언론은 석유·가스 산업을 '지역 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의 영웅'으로 일관되게 묘사한 반면, 진보 성향 언론은 같은 산업을 '환경과 지역 사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프레임화했습니다. 즉, 동일한 현상이라도 누구를 영웅으로, 누구를 악당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기사의 내러티브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며, 이는 결국 여론 형성에 상이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 정책 옹호자와 대중 신뢰도 연구: 이야기의 '내용' 못지않게 '누가 이야기하는가(화자의 신뢰성)'도 설득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청중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똑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강한 설득력과 공감을 얻게 됩니다. 예컨대 기후정책을 추진하려는 정부가 국민이 높게 신뢰하는 과학자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유명 인사를 '영웅적 화자'로 전면에 내세운다면, 단순히 건조한 통계 자료나 행정적 발표만 하는 경우보다 훨씬 폭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실용적 함의를 제시합니다.

 

이처럼 NPF는 어떤 스토리텔링 전략이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행동 변화까지 유도할 수 있는지 다각도로 연구하는 체계적 이론입니다. 특히 기후변화처럼 복잡하고 장기적이며 불확실성이 높은 문제일수록, 효과적인 서사를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인식과 정책 우선순위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론을 정교하게 모색할 수 있습니다.

 

 

6. 맺으며: 이야기로 이해하는 정책의 세계

 

정책서사 프레임워크(NPF)는 "정책은 곧 이야기의 경쟁"이라는 근본적 통찰을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킨 접근법입니다. 특히 환경과 에너지 정책처럼 가치 갈등이 첨예하고 과학적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영역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홍보나 수사적 도구를 넘어 정책 형성과정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동일한 사실과 데이터도 어떤 줄거리와 인물 구도를 통해 전달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인식과 여론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결국 정책의 방향과 내용도 크게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 NPF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정책 담당자나 옹호집단은 NPF의 통찰을 활용해, 단순한 이념적 대립이나 기술적 논쟁을 넘어서 보다 설득력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적인 서사를 전략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정책 지지 기반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반 시민들 역시 다양한 정책 이슈를 접할 때, 각 진영이 제시하는 이야기의 구조와 전략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해체함으로써 보다 균형 잡히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결국 NPF는 복잡한 정책 세계를 움직이는 숨은 원동력인 "이야기의 힘"을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학문적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환경·에너지 분야뿐 아니라 사회 정책, 보건의료 정책, 경제 정책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정책 영역에서 NPF의 렌즈를 적용한다면, 정책 담론의 역동성을 한층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NPF는 정책학의 이론적 논의를 넘어, 실제 정책 현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의 대화와 합의 형성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공통의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대방의 이야기 구조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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